⑩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나니, ⑪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⑫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⑬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Outside the camp) 그에게 나아가자. [히브리서 13장]

 

절에서 "죄를 위한 피" 라고 밝힌 것으로 보아, 절의 우리의 "제단위의 제물" 또한 죄를 위한 피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한다. 때문에 ⑫절에서는 백성을 거룩케 하는 것은 주님의 피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성문밖에서 고난을 받으셨고, 장막제사에서는 그 육체를 영문 밖에서 불사름 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제단의 제물이란? 오늘날 본질의 알맹이는 없고 그 껍데기의 형체만 남아있는 구교회의 영성체와 개신교회의 성만찬 이라는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따라서 히브리서 13장을 통하여, 초대교회에서 죄를 위하여 주님의 빵과 잔으로 속죄의 제사를 드렸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오늘의 우리는 다니엘이 말한 폐하여졌던 매일드리는 제사(개개인의 죄를 속죄하는 일 = 장막제사에서는 성소에 해당한다)를, 초대교회에서 보여 주신 원래의 예법으로 회복하여 구원의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첫 언약에 의한 속죄의 제사는 첫 장막인 성소와 둘째 장막인 지성소가 있었으니, 제사장들이 매일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를 행하였고[개개인의 단독 속죄], 둘째 장막은 일 년에 한번 대제사장이 홀로 들어가 자기와 백성의 죄를 위하여 드렸으니[단독 속죄 연장에서의 마무리 공동 속죄], 이 장막은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으로서 새 언약에 의한 제사의 모형과 그림자였다.

첫 언약에 의하여 섬기는 예법은 대략 다음과 같다. 만일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죄를 범하였을 경우, 그 범한 죄를 인하여 속죄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하느님 앞에서 잡으면,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은 그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리게 되는데, 이는 죄를 제물에게 전가(轉嫁)시켜 대속(代贖)하였음을 증거(證據)로 남기기 위하여 하느님의 법(지성소의 증거궤)앞에 두는 것이다.[휘장을 갈고리 아래 드리운 후에 증거궤(법궤)를 그 휘장안에 들여 놓으라 그 휘장이 너희를 위하여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하리라. ㅡ 출애굽기 26장 33절]

 

성소에서 제사장에 의하여 하느님의 법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죄를 위하여 매일 섬기는 예로(단독 속죄), 일 년 동안 전가된 죄로 더러워진 성소와 지성소를 위하여[부정한 중에 있는 회막을 위하여 ㅡ 레위기 16장 16절], 일 년에 한번 7월 10일 속죄일에 대제사장은 두 염소를 제비 뽑아,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죄를 고하여,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광야 아사셀에게 보내는 것으로 모든 속죄제는 마치게 된다(공동 속죄)[레위기 16장].

 

이와 같이 첫 장막 성소에서 단독 속죄는 제사장이 하고, 둘째 장막 지성소에서는 대제사장에 의하여 공동 속죄를 함으로서, 제사장과 대제사장의 역할이 각각 다르며, 장막 제사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로 속죄하는 새 언약의 예표(豫表) [ antitype ㅡ 대형(對型) ]였던 것이다.

 

 

새 언약에서는 하느님의 법이 우리 마음과 생각에 있다. ㅡ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히브리서 8장 10절, 10장 16절

 

모세가 하느님의 법을 백성에게 고하여 지키게 하였으니, 그들의 마음과 생각에 하느님의 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하느님의 법을 지성소에 두고 그 앞에 휘장을 드리워 속죄하게 하였으니, 우리가 귀로 듣고 눈으로 읽어 마음과 생각에 있는 하느님의 법은 지키기 위한 지식에 속하고, 히브리서 8장 10절과 10장 16절에서 말씀하신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두신 하느님의 법은 심판(審判)을 위한 것이다.

 

휘장앞에 속죄의 피를 일곱 번 뿌리라고 하였으면, 일곱 번을 뿌리는 것이 하느님이 정하신 법에 합당한 일이다. 세 번을 뿌려도 열 번을 뿌려도 합당한 일이라고 한다면, 이는 사탄의 뜻이요 사람의 생각이지 하느님의 법은 아닌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법을 우리 마음에 두고 생각에 기록하신다고 하셨으면, 이 법은 지키는 법이 아니라 속죄를 위한 심판의 법임을 믿어야 할 것이다.(여기에서 심판의 법은 형벌(刑罰)을 위한 것이 아니라, 대속으로 자유를 주려는 심판을 위한 법인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법을 지키지 못하여 발생하는 죄는 우리 스스로가 속죄(贖罪) 할 수가 없다.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속(代贖)의 피를 흘리셨으며, 죄의 값인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하여 부활하신 것이며, 따라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가지고(전이轉移) 대속의 피를 흘리신 것이다.

 

시편 40장 6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 의하면(또한 히브리서 10장 5~7절) ㅡ "⑥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⑦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⑧나의 하느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⑨내가 대회중에서 의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내 입술을 닫지 아니할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⑩내가 주의 의를 내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내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 대회 중에서 은휘치 아니하였나이다. ⑪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 그치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

 

⑥절에서부터 ⑪절까지의 말씀에서, 여호와 하느님 아버지께 말씀한 제1인칭 "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는데, ⑪절까지 말씀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⑫절에서 계속 말씀한 대목에서 우리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이(옮겨짐) 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⑫절 ㅡ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 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 이다. ㅡ

 

⑫절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 전에 느끼신 심적 고통을 미리 예언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지은 죄가 없는 하느님이셨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죄가 머리털보다 많다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 이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에게 우리들의 죄가 전이 되었기 때문이다. 죄가 전이된 사실을 설명한 대목이 바로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에서, 우리들의 죄가 속죄 제물이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이 되었기 때문에, 나의 죄가 머리털보다 많다고 하셨던 것이다.

 

고린도 후서 5장 21절에서도 "하느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느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라는 말씀에서도, 우리는 죄의 전이를 알 수가 있는데, "죄를 삼으셨다 즉 죄를 만들었다"의 뜻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님에게 우리의 죄가 전이 되었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세상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께서 택하신 자들의 죄를 대속하신 것이다. 가롯 유다의 죄를 위하여? 또는 주님을 비방한 주님과 같이 십자가에 달린자의 죄를 위하여? 혹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춘 아나니아와 그 아내 삽비라의 죄를 위하여 주님께서 대속하신 것이 아니리라. 마태복음 13장 11절에 의하면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기에 비유로 말씀하셨음을 밝히고 계시며, 마태복음 22장 14절에 의하면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하느님 아버지의 택함을 입은 사람은 여기에 설명한 새 언약에 의한 속죄제를 기쁘게 받아 드리게 될 것이며, 택함을 입지 못한 사람은 여기에 설명한 속죄제 때문에 아무도 변명치 못하고 더욱 더 죄가 더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죄의 전이에 있어서 2000년의 공간과 시차 때문에 굳이 과거와 현재에 얽매여 생각을 하지 말자. 우리는 장막에서 짐승의 피로서 보이는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흘리신 피로서 하느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영적인 제물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오늘 내일 우리가 죄를 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2000년 전에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위하여 대속의 피를 흘리신 것이다. 하느님에게는 처음과 끝이 하나이다. 바꾸어 말하면 하느님에게는 과거도 현재가 되고, 미래 역시 현재가 되는 것을 참고하기를 바란다.

 

시편 40장 12절에 의하여 우리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옮겨졌음이 확실하다. 이와 같은 2000년의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는 초자연적 사실을 하느님의 능력이라고 믿을 수가 있다면, 영적인 주님의 몸이 함께 있는 축복한 빵을 통하여 나의 죄를 회개하며 고백하고 용서를 구할때에, 2000년 전에 십자가에서 속죄의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합일(合一)됨을 믿을 수 있지 않겠는가?

 

때문에, 우리들이 지은 죄를 용서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밤에 빵과 잔을 가지고 축사하신후 주시며, 『이는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고 내 피라 하시면서 새 언약이니 먹고 마시면서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라고 하셨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축복의 잔)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ㅡ 마태복음 26장 26 ~ 28절] ㅡ

 

[따라서 축복의 잔은 죄 사함을 얻기 위하여 죄인이 마시는 ㅡ 새 언약의 속죄제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ㅡ 요한복음 6장]

 

새 언약에 의한 속죄제를 드리게 하기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베드로 전서 2장 5절의 말씀을 통하여 택함을 받은 우리들을 제사장으로 삼으셨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느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따라서 우리들은 죄인인 동시에 제사장으로서 각자의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각자가 스스로 해결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죄인은 직접 희생제물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 속죄를 할 수가 없고, 죄인과 하느님과의 사이에 제사장을 두어 속죄의 전례를 맡아 보는 직분을 두셨다.>

 

우리는 빵과 잔에 손을 얹고 축복의 기도를 드릴 때에, 하늘에서 내려준 주님의 영적인 몸과 피가 빵과 잔에 함께 있음을 믿어야하며[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빵이니.....요한복음 6장 58절],

주님의 몸인 축복한 빵을 먹을 때에 나의 범한 죄를 회개하고 고백하며 용서를 구하는 기도는,  2000년 전에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위한 속죄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되는 것이며, 죄를 고백하고 먹은 축복한 빵은 하느님의 법 앞에 드리운 휘장이 된다.[히브리서 10장 20절 ㅡ 휘장은 곧 저의 육체(His flesh)니라]

 

제사장의 신분으로서 주님께서 흘리신 피 축복의 잔을 마시며 속죄의 감사 기도를 할 때에, 십자가에서 희생되어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대속의 피는, 내 마음과 생각에 있는 하느님의 법 앞으로 옮겨지게 되는 것이다[단독 속죄]. (사람의 예로, 심판의 법 앞에 빚의 차용증(죄)이 있어 갚지를 못하면 법에 의하여 형벌을 받으나, 누군가 대신 갚아준 영주증(대속의 피)을 십판의 법 앞에 놓으면 자유를 얻으리라. 이와 같이 백만원의 차용증에는 백만원의 영수증을 오십만원의 차용증에는 오십만원의 영수증을 각각 제출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신 우리들의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히브리서 9장 28절][주님의 재림때에 이루어 지는 공동속죄]

 

따라서 첫 언약의 뜰과 첫째 칸에서 제사장이 날마다 드렸던 봉사는, 이제 우리들의 몫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택함을 받은 우리들에게 자신의 죄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흘리신 속죄의 피를 우리 마음과 생각에 있는 하느님의 법 속죄소 앞에 뿌릴 수 있는 제사장의 직분을 주셨던 것이다.[베드로 전서 2장 5절]

 

 

그러나, 우리들은 오늘날 교회에서 죄를 용서 받고 구원을 얻기 위하여 어떻게 하고 있는가? 구교회에서는 죄를 용서 받기 위하여 고해소에서 신부에게 죄를 고백하고, 신교회에서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을 하면 구원에 이룰 수가 있다고 한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죄를 범하였다가 뉘우치고 그 사람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다 하더라도, 이것은 사람과 사람과의 문제이지 하느님의 계명을 범한 죄까지 용서를 받은 것은 아니다. 또한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라 하느님께 직접 죄를 지은 것도 용서를 받아야 한다.

 

우리가 어떠한 잘못을 범할 때에 거기에는 상대가 있는 것이 보통이다. 때문에 우리는 그 피해 당사자에게 용서를 구하게 된다. 내가 A라는 사람에게 잘못을 저질러 놓고 B라는 사람에게 용서를 구할 수는 없으며, B또한 A를 대신하여 나의 잘못을 용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죄의 고백과 용서는 대속의 피를 흘리신 주님께 직접 구하는 것이 당연 함에도 불구하고, 사람에게 죄를 고백하는 고해성사(事)는 누가 만들라고 하였던가? 이것도 부족하여 한대사(赦) 전대사(赦)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고해성사에 관하여는 『8.천국열쇠』 참고)

 

주님께서 잡히시던 밤에도,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가지사 축복하시고......(마태복음 26장 26절), 그리고 사도 바울이 지적한 고린도전서 11장 21절에서도 그들은 주님의 빵과 잔을 먹고 마시기전에 자기의 만찬을 먼저 먹고 마셨다는 말씀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성체를 하기전 한 시간 동안은 어떤 음식도 먹어서는 안 된다는 소위 공심재(空心齋)를 만들고, 이를 어기면 죄를 짓는 것이며 모령성체()라는 중죄를 뒤집어씌우는, 교회법을 만들어 성경말씀을 분명하게 왜곡하고 있듯이, 우리가 지은 죄를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를 받는 예법도, 주님의 빵과 잔으로부터 고해성사라는 제도로 바꾸어 놓았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잡히시던날 우리들에게 주신 거룩한 속죄의 성례가, 사탄에 의하여 전질변화와 상징으로 변경되었고, 주님의 몸과 피가 없는 그냥 빵과 잔을 속죄를 지향하는 목적도 없이 먹고 마심으로서, 이것을 지적하여 다니엘은 매일 드리는 제사(뜰과 첫째칸 성소에서의 단독 속죄 = 축복한 빵과 잔을 통한 속죄와 감사의 단독 속죄)가 1260년 동안 폐하여 졌다고 지적한 것이다.

 

고해성사로 죄를 용서받았고 보속도 잘 하였다면? 하늘나라 가는데 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이다. 하느님으로 부터의 용서는 곧바로 구원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굳이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 6장에서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길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우리에게 생명이 없고, 먹고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주님의 재림] 주님께서 살리신다고 말씀하셨다.

 

만약 우리에게 죄가 없다면? 주님도 십자가에서 속죄의 양이 되실 이유가 없었다. 따라서 주님의 빵과 잔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서 13장 초대교회의 제단에는 주님의 빵과 잔이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죄를 위하여 2000년 전에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니라" 라는 로마서의 말씀이 있어, 골방에서 2000년 전의 십자가를 상상하면서 죄를 회개하고 고백할 때에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할 것인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복음 7장 21절)" 라는 말씀은 들어 보지를 않았는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말씀에서, 마음으로 믿는다고 해서 그 자체만으로 구원을 이루었다고 마침표를 찍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춧돌 몇 개를 놓고 집을 다 지었다고 착각하는 것과 같다. 이제 주춧돌을 놓았으면 그 위에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야 집을 지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느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you will be saved ]" 는 로마서의 마씀은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과 같이 구원이라는 집을 짓는데 있어서 기초 석과 같은 것이다.

 

타인을 위하여 내 목숨을 버렸다 하더라도 그 사랑의 벽돌이 예수님이 아닌 세상적 종교의 주춧돌 위에 놓였다면, 목숨까지 버린 사랑이었다고 할지라도 구원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과 같다.

 

주춧돌만 있어서도 안 되고, 벽돌만 있어서도 안 된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어야 구원이라는 완성된 집을 지을 수가 있다.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을 놓고, 구원을 받았다고 완성형으로 해석하는 오류을 범하여서는 안 된다.

 

따라서 우리가 땅에서 풀고 하늘에 있는 죄를 풀기위한 방법은, 새 언약의 속죄제 축복한 주님의 빵과 잔에 죄의 고백과 용서를 구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먹고 마셔야 한다.

 

고린도전서 11장 26절의 말씀을 통하여 다시 한번 주님의 빵과 잔에 대한, 새 언약의 속죄제에 대하여 알아 보도록 하자.

 

[너희가 이 빵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 For WheneverLord's deathProclaim )

<Proclaim ㅡ 선언하다. 공포하다. 선포하다. 분명히 나타내다. 증명하다>

 

첫째, 이 문제는 보편적 관념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일반적 지식, 혹은 일반 교리적 설명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는 먹고 마시는 사람이 주체가 되어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개별적 사항으로 판단해야 된다는 것이다.

 

둘째, 축복한 주님의 빵에 나의 죄를 회개하고 고백하며 용서를 구하며 먹고, 나의 죄를 대속한 축복한 주님의 잔을 마심은 나의 마음과 생각에 두신 주님의 법앞에 대속의 피를 옮기는 것이다.[외형적 모습이 먹고 마시는 모양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 실제의 내용에서는 죄를 고백한 후에 먹고 마시는 주님의 빵과 잔은, 하느님의 법 속죄소 앞에 드리운 휘장과 속죄의 피를 옮기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먹고 마시는 것은 옮기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나의 범한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단지 상징적 혹은 추상적 개념만으로 죽으신 것이 아니라, 나의 범한 죄들이 모두 실제적으로 주님께 옮겨졌음을 위에서 확인하였다. 그렇다면 주님께 옮겨진 내 죄를 위하여 대속의 피를 흘리시고, 내죄는 죄의 궁극적인 원천인 사탄에게 돌려 주심으로서,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보배로운 피를, 당사자인 본인의 생각과 마음에 있는 하느님의 법앞에 남아 있는 죄의 자국에 이제는 옮겨 놓아야 하지를 않겠는가? 마치 하느님의 법앞에 있는 빚진 나의 차용증에 주님께서 갚아주신 영수증을 제출하여야 상계(相計)되어,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하느님 아버지께서 확인하시고 자유를 주시는 것과 같다. 따라서 A는 A자신의 각각의 죄의 속죄의 피를...B는 B자신의 각각의 죄의 속죄의 피를...그리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주님의 재림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먹고 마시는 사람이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개별적 사항이란? 2000년전 속죄를 위한 주님의 죽으심이, 오늘 먹고 마심으로서 비로소 속죄가 이루어졌음을 본인 자신이 확증(確證)한다는 것이다.

 

[장막제사에서는 죄가 먼저 발생하고 그 다음에 속죄의 피가 발생하지만, 오늘 우리의 새 언약의 속죄제는 속죄의 피가 2000년전에 먼저 발생하였고, 죄는 오늘에 아니면 내일 모레에 발생한다는 것이다. ㅡ 비유가 좀 자연스럽지 못하지만 장막의 제사에서는 배가 고프면 그때 그때 밥을해 먹어야 배가 불렀지만, 오늘 우리의 새 언약의 제사에서는 밥은 주님께서 2000년 전에 미리 지으셨고, 오늘의 우리는 배가 고프면 그때 그때 배가 고플 때 마다 밥통을 열고 감사한 마음으로 먹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셋째, 주께서 오실 때까지 전한다는 것은 한번 용서받은 죄는 다시 번복되어 죄로 삼지 않는다는 것이며, 먹고 마실 때마다 전하는 계속성은 용서받는 죄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가 축복한 빵과 잔에 하늘에서 내려 함께 있는 주님의 영적인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은, 우리의 죄를 용서받기 위한 거룩한 속죄의 제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장막의 제사에서는 뜰과 첫째칸 성소에서 제사장이 날마다 섬겼던 부분에 해당된다.

 

또한 28절의 빵과 잔을 먹고 마시기 전에 자신을 살피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주님의 빵과 잔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크게 선과 악의 두 개의 축으로 볼 때에, 우리 자신의 무엇을 살펴보아야 할 것인지 정리하여 보자.

 

나의 선한 일들을 살피라는 것인가? 아니면 잘못한 일들을 살펴보라는 것일까?

물론 선한 일들이 있어서 자랑 거리를 살펴 볼 수도 있겠지만, 선하고 선하신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살펴서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눈부신 햇빛 아래에서 10촉 전구와 100촉 전구의 밝기를 경쟁할 수가 있겠는가?)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잘못한 일들을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

그렇다면, 질문의 해답은 명확하게 해결이 되지를 않았을까?

 

먹고 마시기 전에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야 할 것은, 선한 일들이 있어 자랑거리를 끄집어내라는 것이 아니라, 잘못한 일들을 살펴서 회개하고 주님께 용서를 구하는 일이, 주님의 죽으심에 정확하게 부합되는 일이 되지를 않겠는가?

 

서기 100~150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디다케(Didache) 제14장의 주일에 관한 기록에서도 주님의 빵과 잔을 먹고 마시기전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내용을 볼 수가 있다.

[제14장 주일]

14.1 ~ 주님의 주일마다, 여러분은 모여서 빵을 나누고 감사드리시오, 그러나 그 전에 여러분의 범법들을 고백하여 여러분의 제사가 깨끗하게 되도록 하시오.

14.2 ~ 자기 동료와 더불어 분쟁거리를 가진 모든 이는, 그들이 화해할 때까지는 여러분의 제사가 더럽혀지지 않도록, 여러분의 모임에 함께 하지 말아야 합니다.

14.3 ~ 이는 주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나에게는 깨끗한 제사를 바쳐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위대한 왕이며 내 이름은 백성들에게 놀랍기 때문이다. 주께서 말씀하시도다."

 

여기에서 깨끗한 제사를 바친다는 것은, 분쟁거리가 있는자는 서로 만나서 용서를 할 것이며, 서로 용서는 하였지만 이미 분쟁거리를 만들었다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범한 것이며, 이 범한죄를 빵과 잔을 먹고 마시기 전에 회개하고 고백하라는 것이다. 깨끗한 제사를 드린다고 해서 고해성사를 받고 먹고 마시라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여야 한다. 분쟁거리가 있어 서로 용서를 할 수가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서로간에 용서없이 빵과 잔을 먹기전에 범법만을 고백한다면 깨끗한 제사가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축복한 잔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흘리신 언약의 피라고 직접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26장 28절]

 

따라서 주님께서 제정하여 주신 『축복한 빵과 잔』은 먹고 마시는 가운데 죄 사함을 받는 『속죄의 성례』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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