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에, 어느 집안에 무슨 일이 있었기 때문에 가족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대표로 희생되어 죽는다면 나머지 모든 가족들이 살아 남을 수 있는 법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가 가족들을 불쌍히 생각하여 도끼에 머리를 맞고 고통 속에서 죽었고, 따라서 나머지 가족 모두는 죽지 않고 살수가 있었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과 함께 나머지 가족들이 살아난 기쁨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아버지의 희생의 죽음이 잊혀지게 되자 어느 자식이 제안을 했단다. 「우리가 도끼를 집에 걸어놓고 그 도끼를 볼 때마다 아버지를 생각하고, 아버지 희생의 사랑과 죽음을 잊지 말고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자고」.

 

그렇게 수십 년 수백 년 그리고 또 천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 피 묻은 도끼는 귀하고 거룩한 존재가 되어 성스러운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먼지가 묻으면 닥아 주고 녹이 나면 기름칠하고, 도끼를 발로 밟거나 혹 침이라도 뱉으면 죄가 되었던 것이다.

 

집을 지으면 맨 꼭대기 가장 높은 곳에 사람들이 잘 보일 수 있도록 항상 도끼를 세워 두었고, 집안에도 여기저기에 도끼를 걸어 놓았으며, 가족들이 모여서 도끼 모양의 형태대로 손가락으로 그 모양을 그리면서 성스러운 기호라는 뜻으로 『성호』라 불렀고, 도끼에 입도 맞추고 예의를 갖추어 절도하면서 그렇게 그렇게 아주 행복하게 살았단다.

 

그러나, 만약 죽은 아버지가 이 광경을 볼 수가 있었다면? 그 아버지는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고통스럽게 도끼에 머리를 맞아 죽고 저희들을 살렸더니, 그 모양 자체도 보기 싫은 그 도끼를 닥고 기름칠하고, 집집마다 걸어놓고 절하며 성스럽고 거룩한 존재로 대접을 하고 있으니, 그 죽은 아버지가 어찌 가슴을 치지 않겠는가? 이러한 것들은 아버지 희생의 사랑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그것은 불충한 생각과 불효의 행동이 되는 것이다.

 

도끼 그 자체는 결코 귀하고 거룩한 존재로 대접을 받아야 할 이유가 조금도 없다. 오직 아버지의 사랑과 그 희생의 죽음만을 생각하며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각자 자기의 아버지가 혹은 어머니가, 또는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위하여 도끼에 머리를 맞아 고통 속에서 죽었고, 그래서 내가 지금 살고 있다면, 그 도끼를 그렇게 귀하고 거룩한 것으로 생각 하겠는가? 집에도 걸고  귀에도 걸고 또 자동차에도 걸고 다닐 수가 있겠는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그 일들을 지금도 하고 있으니 어떻게 된것인가?

 

십자가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사형수를 죽이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죽음은 누구의 것인가?  죽음은『사탄의 권세 아래에』 있는 것으로서 사탄의 것이다.

 

태초에 사탄이 아담과 이브를 유혹하여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지었고, 그 결과 우리에게 온것이 바로 죽음이었다.

 

때문에, 영원한 생명에서 끊어져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다시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시기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외아들 예수님을 보내셨고, 사탄의 권세 아래에 있는 죽음을 이기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죄와 함께 죽으셨던 것이고, 다시 살아나심으로서 사탄의 사망 권세를 이기셨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이 예수님이 흘리신 피로 인하여 새 생명에 이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 ㅡ 고린도 전서 15장 55절

 

사탄의 권세 아래에 있는 죽음을 이기시고, 우리에게 다시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한 법을 만들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잠시 죽으시는 과정이 필요 하셨던 것이며, 그 방법이 2000년이전 당시에는 십자가형 이었던 것이다. 밧줄 일수도, 도끼 일수도, 칼 일수도 있다. 그 도구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엄청난 고통과 함께 죽은 당사자 입장에서 볼 때에는 그 모양 자체도 보기 싫은 끔찍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ㅡ 히브리서 12장 2절.

 

그러한 죽음의 도구에 불과한 십자가를 마치 성스러운 것으로 생각하여 만들어 놓고서 붙잡고 울고, 입맞추고, 절하며 아우성쳐서 어쩌자는 것인가? 이러한 것은 예수님께 대한 불충한 생각과 행동이 되는 것이며,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고 하신, 하느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거역하는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희생적 사랑 그 자체다. 십자가 형상 그 자체가 왜? 중요해서 십자가가 후한 대접을 받아야 하는가?

 

갈라디아서 6장14절의 말씀에 의하면 ㅡ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는 말씀이 있는 바, 사람들은 글자 그대로 해석하여 십자가 그 자체를 자랑스러운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따라서 더욱 더 비약하여 성스럽고 거룩한 존재로 생각하고 믿음의 대상이 되어, 십자가에 입 맞추고 절하며 공경하여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게 되어, 제사의 폐함과 함께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결국은 구원을 얻지 못하고 멸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십자가』라는 단어는 ㅡ 그 단어에 숨어 있는 본 뜻인 『죽음』이라는 단어를 대신하여 쓴 『대명사』 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따라서 갈라디아서 6장 14절의 말씀은 ㅡ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가 되어, 우리는 그 본뜻을 깨달아 알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결코 십자가 그 자체에는 자랑할 이유가 아무 것도 없다.

 

성경에서 십자가는 죽음이라는 단어의 『대명사』로 쓰여 졌다는 증거는, 골로새서 1장 20절의 말씀과 22절의 말씀을 서로 비교하여 보아도 쉽게 이해를 할 수가 있다.

 

[20절] ㅡ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22절] ㅡ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십자가의 피로 ⇒ 죽음의 피로 ⇒ 육체의 죽음으로

 

십자가 = 죽음 = 사탄의 것 = 거기에는 구원이 없다.

 

십자가를 거룩하고 성스러운 존재로 믿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바라 보면서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하는 목적에서, 교회에 십자가를 세워 두거나 걸어 놓는 다고 억지 주장을 하는가?

 

이미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에서 죽으신 것을 알 수가 있음에도 불구 하고, 꼭 십자가를 바라 보아야만 예수님의 죽음이 생각나는가?

 

십자가를 거룩하거나 성스러운 존재로 믿지를 않는다면? 십자가에 침을 뱉을 수가 있는가? 십자가를 발로 짓밟을 수가 있겠는가?

 

꼭 십자가를 쳐다 보아야만 예수님의 죽음을 실감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면?, 십자가를 교회에 세워 두거나 걸어 두지를 말고, 교회의 현관 바닥에 아무렇게 팽개쳐 놓고 발로 짓 밟으며 오고 가면서 주님의 죽으심을 생각하는 방법은 어떨까?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회]를 비롯해서 그리스 정교회 와 러시아 정교회, 그리고 성공회 및 루터 교회 에서는 교회의 모든 예식때 십자가 모양의 성호를 손으로 긋는다. 따라서 거룩한 표라는 뜻의 준말인 『성호(聖號)라는 말에서, 여러분은 십자가를 이미 거룩하거나 성스러운 대상으로 믿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들어난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변명도 있을 수 없으며, 더 이상의 억지 주장은 여러분 스스로를 속이는 것뿐이다.

 

개신교회의 사람들은 이렇게 까지 요란하게 법석을 떨지는 않아도, 그 마음속에 십자가를 거룩하거나 성스러운 존재로 생각하고 믿고 있는 것은 구교회와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여러분은 십자가 형상에 사람 모양의 조각품이 붙어 있으면 우상숭배의 죄가 되고, 없으면 우상숭배의 죄가 되지를 않는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여러분은 자동차에 십자가를 걸어 놓고서 운전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슨 이유가 있어서 그럴까?

 

여러분은 십자가 형상이 무슨 신통력이라도 있을 것 같은 믿음이 있기 때문에, 십자가를 부적처럼 차에 걸어 놓으면 사고가 나지 않을 것 같은 마음에서 걸어 놓치를 않는가?

아니라면? 당장 차에서 떼어 내어 바닥에 놓고 발로 짖밟으면서, 우리들을 위하여 희생양이 되신 주님의 죽으심만을 생각할 수가 있겠는가?

부적처럼 십자가에 대한 믿음이 바로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

 

십자가 아래에 모이는 사람들은 우상숭배의 죄를 범함으로 구원이 없고 멸망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야 말로 주님께서 미리 말씀하신 『멸망의 가증한 것』이다. [마태복음 24장 15절 ㅡ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 십자가 ] 거룩한 곳에[ = 교회 ] 서는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 진저)』].

 

그리고 다니엘서 에서는 이 멸망의 가증한 것의 세움이, 매일 드리는 제사의 폐함과 함께 일어남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다.

 

이와 같은 사탄에 의한 거짓된 교리는, 지금의 교회에서 하느님의 진실된 가르침[교리]과 섞여서, 함께 가르치고 배우며 행하여 지고 있는데, 이것은 세상 끝날 에 까지 갈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구원이 있을 수 없다.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고린도전서 10장 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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